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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퇴근하는데 말이야. 늦은 밤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내가 너무 낯설어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 양복을 챙겨 입고, 구두를 신고, 표정 없는 얼굴로 축 늘어진 어깨를 가진 내가 이질적으로 다가온 날이었지. 분명 나이 앞자리가 1일 때의 내가 그리던 나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잘 다져진 트랙을 내디디며, 바람과 부딪치며 달리는 게 좋았던 그때의 나는 내가 커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도 될 줄 알았어. 꿈이 컸지. 현실은 생각보다 쉽게 깨달았고, 고3이 되던 해,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체육과 대신 적당히 취업이 잘 된다는 학교에 적당히 취업이 잘 되는 학과 쪽으로 원서를 썼지. 대학 생활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시체 같았거든. 술과 과제에 절인 걸어 다니는 좀비.
어쨌든 이력서를 채울 몇 줄의 스펙을 가지고 졸업도 하고, 반 년 정도의 백수 생활 끝에 취직하고. 그게 벌써 어언 몇 년 전이야. 시간이 다 지나고 나니 십대의 나는 허무하게도 20대 청춘을 지나 30대에 길목에 발을 넣었지.
남들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시드는가. 회의감이 들었어. 그동안 연애를 한 번도 안 했느냐고? 설마. 근데 그놈의 야근과 철야, 출장 등으로 길게 간 연애가 없지. 넌 내가 우습냐며 우는 여자도 있었고, 그렇게 일이 좋으면 일이랑 결혼하라고 길바닥에서 개 패듯이 나를 두들겨 팬 여자도 있었지. 무려 300만원이 훌쩍 넘는 명품백으로 말이야.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일에 찌들어 나이만 훌쩍 먹은 내가 돌아갈 곳이 겨우 10평 조금 넘는 오래된 원룸이라니 그게 너무 서글픈 거야. 당장에 폰뱅킹으로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결심을 세웠지.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못해 이사했다. 집을 충동구매했어. 아니, 물론 집을 산 건 아니고 전세. 그래도 월세 아니고 전세야. 심지어 역세권, 맥세권. 창문 열면 햇볕도 들어오고, 책장을 넣을 자리도 있는 제법 큰 집으로. 혼자 사는 살림 많아 봤자 얼마겠어. 고작 박스 몇 개 짊어지고 이사를 하는데 옆집 대문 앞에 웬 외국 남자애가 서 있는 거야. 순간 머릿속으로 '헬로', '봉쥬르', '구텐탁' 등등 무슨 인사를 해야 하나, 아니, 인사를 하긴 하는 게 옳긴 한가하고 고민이 드는데 이미 사회생활에 찌든 이 주둥이가 멋대로 인사를 건네더군. 뇌가 생각하기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어. '안녕?' 하고. 근데 이 외국 어린애가 (척 봐도 겨우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 말고 인사를 하자마자 대답도 없이 쌩하니 제집으로 들어가 버렸지. 쿵.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어. 아, 저 양놈 싹퉁바가지 보소...? 라고.
Prologue. M'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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