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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그리고 일주일. 꼬박 일주일간 뉴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때때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나, 현관을 오갈 때. 늦은 새벽 혼자 도어락을 풀 때 그 애를 떠올리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가지런히 골라진 트랙 위에 삐죽이 튀어 오른 요철처럼. 그 애가 꼭 그랬다.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진 내 일상에 던져진 돌멩이 조각. 내가 일, 혹은 내 생활이 아닌 다른 것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오랜만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뉴트가 떠오를 때면 나는 꼭 혀로 입안을 쓸었다. 불편했다. 그래. 사실 말하자면 나는 그애가 불편했다. 외국인이고, 어리고, 당돌하기 짝이 없는 뻔뻔한 그 애는 내게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떠오르는 기억으로 괴롭느니 차라리 그를 직접 보고 싶었다. 불편해지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보고 싶었다.
N. 그 창피했던 일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 마주쳤다면 그 흑역사가 떠오를 거 같았다. 다행히 마주치지 않았고 그 사건은 잊히려 했다. 그 뒤로부턴 술도 조심했다. 입학준비도 해가며 새집에 필요한 것도 차곡차곡 사들였다. 피곤한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주말. 노트북을 구매했다. 상태가 좋지 않던 컴퓨터는 끝내 고칠 수 없어졌을 정도로 손상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노트북을 샀지만, 노트북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하나의 문제점이 생겼다. 나는 기계치라는 거다. 인터넷을 뒤져도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게다가 친구들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한참 노트북을 보다가 만져보다가 한참을 싸우다 고민 끝에 낸 결론은 옆집에라도 물어보자, 였다. 옆집 아저씨는 회사원이니까 컴퓨터는 잘 만지지 않을까. 그리고 노트북을 조심스레 안고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옆집도 없으면 난 평일이 되기까지 이 노트북을 못 만지겠지. 제발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을 쳐다봤다.
"...저기요...?"
M. 주말을 맞아 멍하니 한참 소파에 누워 숨을 쉬는 것에만 집중을 쏟았다. 분명 금요일 새벽에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일요일 아침이라니. 깔끔히 도려낸 토요일이 아까워 무언가를 할 의욕이 한 줌도 없었다. 왜 사냐고 물으면 그저 웃지요. 허허허허허. 홀로 빈방에서 헛웃음을 터트리는데 울릴 리가 없는 초인종이 울렸다. 보나 마나 열렬한 종교인들일 것이 뻔해 없는 척해 보려 숨을 죽이고 소파 위에 길게 늘어트린 발만 까딱이는데 도무지 저놈의 초인종 소리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냐 그래. 내가 졌다. 시발. 지들이 전기세 내 줄 것도 아니면서 초인종은 지문이 닳도록 누르는구나. 거실 바닥을 내딛는 발바닥으로 귀찮음이 들러붙어 쩌억쩌억 소리를 내었다. 그것들을 털어 낼 생각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열었다.
"부처님이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알라신이고. 사탄의 엉덩이를 따먹는 게 인생 목표인 놈입니다. 뭐 문제 있..."
문 앞에는 그렇게도 분주히 내 머릿속을 뛰어다니던 뉴트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N. 귀찮음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온 그가 하는 말을 보니 종교인인 줄 알았나 보다. 그나저나 사탄의 엉덩이를... 이상한 사람을 보는듯한 모습을 빨리 지우고 노트북을 보여줬다.
"컴퓨터 만질 줄 알아요? 사탄 엉덩이 따먹는 게 목표인 아저씨?"
M. 난 진짜 진지하게 고민 좀 해 봐야 한다. 왜 이놈 앞에만 서면 뇌가 일을 안 하는지. 경멸 어린 시선과 함께 내밀어 진 노트북을 받아 들고 내심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굳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뭐가 문제인데?"
N. 문제? 문제보다는 처음부터 손을 못 대겠다는 거다.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랜선 연결하는 법 좀 알려줘요...'"
M. 랜선...? 아니, 얘는 랜선도 연결 못 하는 애가 지금 노트북을 샀어? 황당함에 헛웃음을 터트리자 말간 얼굴에 가느다란 주름이 세로 졌다. 그에 냉큼 고개를 돌리며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었다.
"가자. 너희 집."
N. 내 말에 헛웃음을 터트린 모습에 뚱하니 인상을 썼다. 사람이 할 줄 모를 수도 있지... 창피함도 무릅쓰고 부탁했는데... 괜히 더 창피해졌다. 집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방을 대충 치웠다. 이참에 모르는 것들 실컷 물어봐야지.
M. 휘, 둘러보자 이놈의 집은 뭐 TV도 없다. 랜선이 뭔지도 모르는 놈 집에 선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혹시나 싶어 노트북을 켜고 와이파이를 확인하니 내 집의 신호가 꽤 잘 잡혀 있었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두드리고 자동 연결까지 걸어두는 데 걸린 시간 1분. 집주인은 분주히 제집을 치우며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길래 모르는 척 제어판을 들락거리며 그의 집을 둘러보다 침대 위에 올라앉은 하마 인형과 그대로 눈이 마주친다.
"나이가 몇인데 인형 안고 자?"
N. 대충 방을 정리했다. 그는 인형을 보면서 애냐고 놀려댄다. 저 무민을 사려고 내가 먹은 도넛만 몇 개인데!?
"스무살이라 안고 잘 수도 있죠. 저 인형 몰라요? 유명한데."
흐뭇한 표정으로 본 노트북은 인터넷이 연결돼있었다. 분명 선을 연결한 건 아닌데? 어떻게 한 걸까? 신기한 마음과 대단함에 이것저것 물어봤다.
M. 재잘거리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작은 얼굴에 대강 건성으로 대답을 내어주는데, 연신 오물거리는 입술과 씰룩이는 하얀 뺨과 나를 향하는 모카색 눈동자 따위가 유난스레 눈에 들었다. 점점 대답은 흐려지고,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너를 보았으니, 이제는 만지고 싶다는 생각.
N. 이것저것 물어보니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노트북을 이리 저리보다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가 생각하는 분위기지만 계속 보기에는 민망했다.
"아저씨 뭐해요?"
M. 눈을 가늘게 뜨며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잠시 멍했던 정신을 잡아채자 이미 내 손바닥에 닿은 그 애의 뺨이 말랑했다. 한껏 당황을 집어삼킨 얼굴에 나는 그제야 물을 수 있었다.
"만져도 되냐?"
N. 갑자기 내 뺨을 만지는 행동에 놀랐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런 행동이 나오지? 그 뒤에 들려오는 질문은 황당함을 주었다. 만져놓고선 물어보는 건 무슨 심보인가.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장난에 손을 떼어내고 씩 웃었다.
"뺨 만지려면 돈 내요. 내 뺨 비싸요."
M. 놀고 있네. 이거 뭐, 원조 뛰는 여고생도 아니고. 황당한 제안에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멀뚱히 닿아오는 시선은 현관으로 가 슬리퍼를 끼워 신을 때까지도 계속 달라붙어 와 문을 열기 전 나는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럼 뺨 말고 엉덩이는 그냥 만져도 되냐?"
N. 몸을 일으켜 나가는 모습에 장난이 심했나? 머리를 긁적였다. 배웅은 해야지. 일어나 따라가니 갑자기 등을 돌렸다.그리고 하는 말이 엉덩이는 만져도 되냐니... 이 아저씨 변태였어? 얼굴을 찌푸리고 문을 열어 내보냈다.
"엉덩이 만지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변태 아저씨야!"
소리를 빽 지르고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M. 계집애도 아니고. 거, 유난은. 한번 만질 수도 있지. 사람 무안하게. 쾅 소릴 내며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채 뒷머리를 헤집다 다시 뉴트의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지문이 닳도록.
N. 무슨 저 변태 같은 아저씨가 다 있지? 아직도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밥이나 먹자. 부엌으로 향하려는 순간 초인종이 여러 번 울렸다. 복수하는 건가? 이를 바득 갈고 문을 벌컥 열었다.
"왜요?"
M. 다시 봐도 예쁘네-. 그러니까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 한껏 열이 오른 얼굴이 퍽 귀여워 웃음이 나 푸스스 웃으며 문틈으로 발을 끼워 넣었다.
“핸드폰 줘 봐. 경찰서 번호 찍어줄게.“
N. 저 아저씨 진짜 변태였나? 당장 이사준비를 해야 할지 걱정이 들었다. 문틈으로 슬쩍 보고선 문을 닫을 타이밍만 찾았다.
"경찰서 번호 알거든요. 발 치워요."
M. 경계심 가득한 얼굴에 정말 범죄자가 된 기분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진짜. 눈싸움이라도 벌이듯 부딪혀오는 시선이 따가웠다.
"웃기지 마. 네가 끽해야 112지. 제일 빠르고, 확실한 직통 번호 찍게 가져와."
N. "그게 무슨 번호인데요."
정말 저 아저씨 범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문고리를 세게 잡고 경계했다. 112라도 누를까...?
M. 쪼끄마한 게 의심은 되게 많네. 내가 사고 쳤을 거면 여기서 이렇게 이빨까고 있겠냐? 벗겨놓고 보지, 시발.
"아, 뭐 이렇게 말이 많아? 얼른 가져와. 형 바빠. 바빠 죽겠는데 네 노트북 하나 고치겠다고 여기까지 거동했거든?"
N. 거동은 무슨. 바로 옆집이면서! 불신이 가득 찬 눈빛으로 휴대폰을 줬다.
"빨리 줘요."
M.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시선이 내 얼굴과 제 핸드폰을 번갈아 보기에 바빴다. 손에 쥐여진 핸드폰에 열한 자리 번호를 누르고 그 뼈만 비죽한 손에 쥐여주었다. 빌미 삼아 잡은 손을 꾹 쥐자 마른 손이 나의 손바닥에 담겼다.
"이제 너는 내 번호를 알고, 나는 몰라. 여기서 연락 안 하면 네가 나쁜 놈 되는 거다. 알지? 언제든 연락해. 형이 도와줄게."
언제든. 무엇이라도, 말이야.
N. 뭐야 번호 준거였어? 괜히 왜 무섭게 경찰 번호를 얘기한 거야? 뚱하니 보다 휴대폰을 빨리 가져갔다.
"연락 안 해도 나쁜 놈 안되거든요. 빨리 집에나 가요 변태 아저씨야."
언제든 도와준다지만 아직 의심은 남아있었다.
M. 퉁퉁 부은 얼굴로 삐딱하게 바라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입술이 말랐다. 더 했다간 정말 화를 낼지도 몰라서 그대로 발을 빼고 몸을 물렸다.
"변태도 아니고, 아저씨도 아니야. 네 노트북을 고쳐 준 친절한 형이라고 해."
말을 맺으며 내 손으로 직접 문을 닫아주었다. 닫힌 문 뒤에 그 애가 쉽게 등을 돌려세우지는 않았기를 바라며 나 역시 다시 나의 안락한 소파를 찾았다.
N. 문이 닫히고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번호를 보았다. 일단 저장. 그리고 노트북을 보았다. 천천히 웹서핑이나 해야지. 그러다 또 멈춘 컴퓨터에 폰을 바라보았다. 물어보랬어. 변태지만 이건 해결해야 해. 그리고 침착히 폰을 들었다.
[아저씨 자요...?]
M. 깜빡 잠이 들었다 깨자 때마침 머리 아래 베고 자던 핸드폰이 들썩였다. 짧은 간격의 진동에 미끈한 액정 위로 손가락을 밀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의 짧은 메시지가 하나. 누구라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저 짧은 호칭에서 번호의 주인을 금세 알아차렸다.
[아저씨는 모르겠고, 형은 안 자는데? 근데 누구야? 어느 동네 미스 리가 날 찾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N. 모르는 척 문자 보내는 거 봐. 액정을 빤히 보다가 화면을 두드린다.
[아저씨. 형이라고 사기 치면 안돼요. 컴퓨터 고장 났는데 도와줘요...]
M. 금세 돌아오는 메시지가 제법 빨랐다. 매일 답장 느린 늙은이들과 업무 문자만 주고받다, 젊은 애 메시지 속도에 놀라다니. 늙은 건가. 씁쓸한 상념은 삼키며 액정을 두드린다.
[척 봐도 새 컴퓨터던데 뭐 벌써 고장을 내?]
N. [업데이트한다고 잘되다가 안 되는걸요? ...나 뭐 잘못 누른 거예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꺼지겠지. 무민을 안으며 휴대폰을 보았다.
M. 업데이트하다가 안 돼? 그거 그냥 단순 업데이트 오류 아닌가? 이런저런 대안을 문자로 열심히 찍어보지만, 답장은 없었고. 전화를 걸어봐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얘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건데? 손에 들린 핸드폰만 노려보다 밤샜다.
E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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