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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너무도 당연히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그 애는 내 이불도 돌돌 말아 제 팔다리 사이에 끼고 잤다. 덕분에 나는 갈 곳을 잃고 TV앞 러그에 겨우 몸을 말고, 패딩 점퍼를 덮고 잔 신세. 추워서 잠도 안 와, 시발. 몇 번이나 자다, 깨다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니, 저건 왜 남의 집을 제집처럼 쓰는데?! 뭐. 아메리칸 마인드는 저런 거야, 시발? 눈에 힘을 빡 실어 고개를 휙 돌리자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깜빡이는 말간 얼굴과 마주쳤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이 조금도 피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에, 밤새 중얼거리던 욕을 퍼부으려 겨우 입을 열었다.
"외국 놈들은 자다 깨도 예쁘냐."
아, 시발... 이거 아닌데...
N.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전혀 다른 이불, 집과는 전혀 다른 공간. 심지어 낯선 집의 향기까지.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여긴 어딜까. 난 분명 집에 들어간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속까지 쓰려 왔다. 집과 다른 풍경에 몸을 돌아보니 옆집 아저씨의 얼굴과 마주쳤다. 그는 왜 여기 있는가...? 라는 멍한 질문과 서서히 떠오르는 어제의 만행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어떻게 뛰쳐나가야 잘 뛰쳐나갔다고 할지 엄청난 고민을 했다. 그 고민을 하는중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쁘다니? 저건 무슨...? 저 아저씨, 술이 덜 깼나?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 어젯밤 일에 다시 창피해 이불에 얼굴을 박았다.
M. 그 애는 마치 못 들은 소리를 들은 양 경멸스런 얼굴로 나를 훑어보다 다시 이불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니, 왜. 뭐. 왜 시발. 뻘쭘함이 차올라 괜히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며 그 애를 불렀다.
"야. 너 밥 먹냐, 빵 먹냐?"
N.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어제 술이 뭐라고... 창피함에 얼굴을 못 들겠다. 이대로 빨리 나가는 게 덜 창피할까? 결국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잽싸게 집에 가는 것이었고,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M. 냉장고를 열어봐도 보이는 건 맥주에 마시다 만 아이스와인이 전부라 별 소득 없이 문을 닫는데 후다닥 달려나가는 발소리에 고개를 내밀자 신발을 끼워 신는 그 애가 보였다. 머리는 미친년 산발을 해서는...
“숙박비 내놓고 가.“
N. 급하게 나가려는 내 행동은 그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숙박비? 아니 무슨 숙박비...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숙박비를 요구했다.
"무슨 숙박비요...?"
M. 순간 튀어나간 말에 돌아보는 얼굴 가득 묻어난 황당함에 커다란 두 눈이 동그랬다. 어이없지? 형도 그래, 시발... 그러나 여기서 말을 얼버무리기엔 남자의 가오가 있지.
“내 침대 비싼 거야.“
나도 나 치졸한 거 아니까 그렇게 보지 마라.
N. 침대가 비싸다고 숙박비를 내놓으라니... 저게 무슨 어른이야 어린이야? 당황과 어이없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보다가 신발을 벗고 그에게 다가갔다.
"얼마인데요?"
M. 성큼 거리며 다가오는 그 애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쪼그라든다. 이 미친놈아 거기서 숙박비가 말이야 밥이야 시발... 이윽고 그 애가 내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는 또 한 번 뇌를 거치지 못한 말이 흘러나갔다.
“근데 넌 시발 무슨, 고삐리가 학교도 안 가고 술을 처마셔?“
아. 목소리 너무 크게 나갔다. 망했네.
N. ㄱ... 고삐리? 고삐리가 술을 마시냐고 큰 소리 내는 그를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고삐리 아니거든요?"
M. 발끈한 얼굴로 주먹까지 말아쥐고 빽 소리를 지르는 그애의 얼굴이 붉었다. 그 모습에 새삼 흥이 돋아 등 뒤에 둔 싱크대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섰다.
“뻥카친다. 야. 학생증 내ㄴ... 학교는 다니냐?“
N. 거만하게 팔짱을 낀 모습에 어이가 없어 곧 다닐 학교를 말했다. 성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니 새삼 뿌듯함과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서인지 의기양양해졌다.
"고삐리 아니니까 술을 마셨죠."
M. 그 애가 말한 곳은 회사가 있는 동네의 대학교였다. 의심은 여전히 연기를 피워냈지만, 어찌나 당당한 얼굴인지 무어라 더 대꾸를 하기도. 거 참. 야. 근데 너…
“너 이름은 뭐냐?“
N. 아직도 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직도 의심할 게 더 남아있는 거야? 아직도 못 믿겠다는 그의 눈빛에 뚱해 있으려는 찰나 이름을 물어봤다.
"뉴트, 요."
M. 뉴트요. 하고 뚱하니 입술을 내미는 얼굴이 퍽 귀여웠다. 어린 티가 풀풀 나는 주제에 한마디도 안 지려 바락 거리는 모습까지. 푸슬 웃으며 흘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어느새 9시. 지각은 확정이었다.
“라면 먹고 갈래?“
N. 좀 전까지 고삐리라던가 그런 험하니 인상이 피식 웃는 모습에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인상이 좋아야 하는 걸까. 시계를 보고 라면을 먹을거냐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속도 쓰리고 별로예요. 그리고 출근 아니에요...?"
M. 라면 먹고 갈래-? 그거 우리나라만 통하는 거였나?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긴 했지만. 깔끔하다 못해 칼 같은 거절에 별다른 대꾸를 찾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가라.“
별것도 아닌데 피곤이 밀려왔다.
N. "일단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라는 말에 꾸벅이고 나왔다. 숙취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직도 내가 주정 부리면서 저 집에서 나왔다는 게 창피했다. 게다가 울기까지 했다니... 다시 얼굴에 열이 올라와 서둘러 집에 들어갔다.
E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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