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N. 엽서가 왔다. 집에 올 엽서는 없는데... 부모님일까? 사진과 함께 카드 뒤편에는 부모님의 글씨가 아니었다. 옆집. 민호의 편지였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한다. 떠날 때도 연락도 안 했던 그에게 온 첫 연락. 엽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폰을 들었다.
[연락 참 늦네요. 내 생각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요. 오면 안아줄까 고민은 해볼게요.]
M. 공항에 도착해 핸드폰을 켜자마자 띄워진 메시지에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고민은 해 본다니? 얘 뭐가 이렇게 귀여워서 사람 정신을 속 빼놓는 거지? 장시간 비행에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그라들었다. 한가득 들고 온 짐을 택시 트렁크에 싣고, 운전사 아저씨를 재촉했다. 아저씨,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창문을 넘어 들어 얼굴의 열을 식혀주는 아침 공기가 시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오피스텔의 현관 앞에서 마침 문을 나서는 그 애가 보였다. 나는 뒤에 세워 둔 트렁크에 걸터앉은 채 크게 그 애를 불렀다.
"Good morning, sweety."
N. 우유가 다 떨어져 아침 일찍부터 나갔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고 우유를 사러 나가는 귀찮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온 거야? 엄청 늦게 오는 거 아니었어? 반가움과 놀람이 공존했다.
"벌써 온 거예요...?"
M. 놀란 마음에 커다래진 눈과 차가운 아침 공기 탓인지 상기 된 얼굴. 오랜만에 보니 쟤는 더 이뻐졌ㄴ... 병이네. 병 맞네. 이거. 스스로를 향한 웃음을 삼켜내며 두 팔을 벌렸다.
"왔으니 안아줘. 어서."
N. 뻔뻔하게 팔을 벌린 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늦게 오는 줄 알고 얘기했건만...
"생각만 해본다 했잖아요. 바보 아저씨."
짧게 메롱을 하고 옆으로 피해갔다.
M. 허허? 저놈 보소. 어른을 희롱해? 혀를 쏙 내밀고 빠져나가는 멀끔한 얼굴에 헛웃음을 터트리다 팔을 뻗어 그 얄팍한 허리를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형 운동한 거, 네가 몰랐구나.
"열흘만이다. 이 정도는 좀 반겨라, 임마."
N. 옆을 지나가는 순간 허리가 잡혔다. 무슨 힘이 이리 세!? 결국은 꼭 안고 등을 토닥였다.
"열흘 '밖에'죠."
M. 어깨너머로 가볍게 내려앉는 옅은 숨결과 등을 토닥이는 손바닥의 체온 따위에 숨이 더뎌졌다. 열흘 '밖에'라니. 형은 너 보고 싶어서 목말라 죽을 뻔했어.
"솔직히 너도 나 보고 싶었지?"
N. 열흘 만에 올 걸 늦게 올 줄 알고 아쉬워한 내가 창피했다. 품에서 나와 씩 웃어줬다.
"보고 싶긴 했어요. 잘 왔어요."
M. 어느 작가가 그러더라. 눈앞에 그 사람이 웃을 때 눈이 멀고, 귀가 먹는 것 같다면 그건 필시 그대의 사랑이리라고. 가슴이 뛰었다. 나에게서 거리를 둔 뉴트의 손목을 쥐고 눈을 맞추었다.
"내가, 계속 생각한 게 있거든?"
N. 손목을 잡고 빤히 보는 모습이 이상했다. 우유 사러 가야 하는데...
"뭔데요? 나 우유 사러 가야 해요"
M. 제 머리 색과 같은 짙은 갈색 속눈썹이 늘어선 눈꺼풀을 깜빡이는 그 애의 두 눈은 내 한 손에 쉽게 가려졌다. 그리고 채 다물리지 못한 입술에 나의 마른 입술을 꾹 눌렀다 멀어졌다.
"넌 이제 존나 내 생각만 할 거야. 그렇지?"
N. 갑자기 눈이 가려지고 입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누구 알려줄 사람? 손을 떼어내고 입을 닦았다.
"뭐하는 거예요? 우유 사러 가야 한다니까!"
M. 아아, 입 닦은 건 좀 상처인데. 아마도 처음이었을, 가족이 아닌 타인과의 입맞춤을 우유보다 못한 것으로 만든 녀석의 황당한 대꾸에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가렸던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 밀었다.
"나야, 우유야."
N. 우유이냐, 민호이냐.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왜냐하면, 지금 너무 배가 고팠다. 고민 끝에 결정했다.
"아마 아저씨요?"
M. 앞에 붙은 '아마' 두 글자가 그리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걸 걸고넘어졌다가는 당장 우유를 향해 등을 돌릴 그 애를 알았다. 그래, 그러면 형이 오늘은 여기까지 해?
"아저씨 말고 자기야, 가 더 좋은데."
그럴 리가. 내가.
N. 자기야는 또 무슨 헛소리야. 외국물 먹고 왔더니 더 변태같아졌다.
"싫은데요 아저씨. 자기야는 애인한테나 들으세요."
인상을 찌푸리곤 그의 옆으로 쌩하니 지나갔다.
M. 타닥타닥, 바닥을 내디디며 달려나가는 겅중한 뒷모습에 하하, 웃음이 터졌다. 냉정한 그대는 어느새 내 마음에서 녹아들어.
"자기야, 그럼 네가 오빠 애인할래?"
N. "자기야가 아니라서 못 해주겠네요. 게다가 나한테는 형이지 오빠가 아니죠."
톡 쏘아주니 기분이 좋았다. 연락도 잘 안 하고 일찍 온다는 얘기 안 한 벌이다. 이제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M. 그러니까 저 어린 게 학습 능력이라는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더란 말이지. 구렁이 담 넘듯이 넘겨보려고 했더니, 되려 제가 스르르 빠져나간다. 톡 쏘는 탄산처럼 청량한 웃음을 남기고 도망가버린 뉴트의 모습에 괜히 간지러운 가슴을 문질렀다.
N. 우유를 사서 돌아오는 길. 아직도 통쾌한 기분이 남아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EP. 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