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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아침부터 지각으로 욕을 쳐들어 먹고, 정신없이 달달 볶이다 택시를 잡아타니 어느새 자정이 넘어 간 시간이었다. 집에 가면 그대로 기절을 하겠지. 절로 흘러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자 까만 야경이 보이는 유리창 위로 아침의 그 황당한 녀석이 떠올랐다. 모카색 머리와 그것과 똑같은 모카색 눈동자. 혼혈이야? 생각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서양인의 이목구비였다. 창백함과는 다른 새하얀 피부까지도. 훌쩍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뚱이는 아직 채 여물지 못한 어린 것이 분명했다. 싸가지 없는 놈. 한국말도 할 줄 아는 놈이 지난번엔 우리 회사 쫑구(백구. 3세. 수컷) 개 껌 씹듯 씹어버리고는.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은 안돼.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자 혼잣말에 심취한 나를 백미러로 흘겨보는 운전기사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눈을 감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음을 알려 왔다. 지갑을 뒤적여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새벽의 오피스텔은 조용했고,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어 두 팔을 쓸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어째 올라갈수록 시끄러워지는 것은 기분 탓인가...?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나는 아침과 똑같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멍청히 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대문을 발로 걷어차는 아침의 그 외국인 때문에.
N. 산책도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게임도 하고 TV도 보고. 잉여라고도 할 만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에 만날 친구들도 기뻤다. 저녁이 되고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고 갓 성인이 된 우리는 제 주량도 모른 채 실컷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마신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고 엘리베이터까지 탔다. 그리고 집 앞에 도착했다. 아직은 자기 집도 못 알아볼 정도로 취하지 않았다는 것에 뿌듯함과 함께 도어락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틀렸다는 소리였다. 내 실수가 있었나 의문에 다시 몇 번이고 눌러보았다. 돌아오는 똑같은 소리. 분명 내 집인데 왜 안 열리는 건데! 슬슬 짜증과 함께 손잡이를 계속 열어보고 문을 발로도 차보고 다시 번호도 눌러보았다. 계속 열리지 않는 문을 째려보곤 또 한 번 걷어찼다.
M. 탈탈 털린 어이를 주워 삼키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그의 뒤에 팔짱을 끼고 선 채 이놈이 뭐하나, 지켜보았다. 그는 우리 집 문을 몇 번이고 발로 찬 뒤에 다시 도어락을 탕탕 두드렸다. 저러다 남의 집 문짝 부수겠네. 다시 털려 나가는 어이를 꿀꺽, 삼켜내고 최대한 경계하지 않을 법한, 사회생활용 젠틀한 말투를 꺼내어 그를 불렀다.
"이 봐요. 남의 집 앞에서 뭐 하세요?"
그동안 고까웠는데, 너 시발. 잘 걸렸다.
N.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옆집이네. 왜 내 집을 남의 집이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남의 집이요??? 내 지입인데요오?"
그리고 다시 힘주어 도어락 버튼을 누르다 쿵쿵 문을 찼다.
M. 아니, 어디서 이런 뻔뻔한 생물체가. 문에 붙은 호수를 다시 확인해 보지만 내 집이 맞다. 당연하지. 어떻게 저걸 잊어. 작년에 딴 새끼랑 결혼한 전 여친 생일이랑 똑같은데.
"두 번 봐도 거기 내 집인데, 학생?"
N. 문은 안 열리고 뒤에서는 자기 집이라 하는 이 상황이 짜증이 났다. 저 아저씨가 술 마셨나?
"아닌데....내 집인데에..."
계속 열리지 않는 문에 머리를 기대어 중얼거렸다.
M. 염병. 내가 시발 살다 살다 민증도 안 나온 새끼 술주정을 다 받네. 저런 애기 얼굴한테 술 파는 새끼 양심은 가내 평안하시냐? 한껏 차고 오르는 짜증에 구겨지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쥐었다.
"내 집이라고."
N. 어깨를 잡은 손을 보고선 추욱 앉았다. 집도 못 들어가고 이대로 자야 하나 막막했다. 혼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지금, 모든 게 막막하고 두려웠다. 왈칵 올라온 서러움에 눈앞이 흐려지고 눈물이 났다. 뒤에서 인상을 쓰던 그를 보면서 엉엉 울고 싶어졌다.
"아저씨... 내 집 문 좀 열어줘요..."
M. 지랄 부르스를 춰라, 아주... 이제는 아주 내 멱살을 쥐고 엉엉 울음을 쏟는 녀석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당장 경비실에 신고라도 하고 싶은데 손등이 하얗게 질리도록 붙든 모습에 결국 긴 한숨만 내쉬며 도어락을 풀었다.
N. 열리는 문은 보니 서러웠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환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 포근한 이불이 느껴져 그대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M. 그 애가 웃었다. 교복 자락을 팔랑거리는 열 몇 살 계집애들보다 더 말간 얼굴로. 순간 꼼짝도 할 수 없이 멈춰선 나를 두고 열린 문 사이로 제집인 양 홀랑 들어간 그 애가 내 침대 위로 털썩 눕는 것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아들이 이렇게 과로사로 가는가 봅니다. 옆집 사내새끼 웃는 얼굴에 열이 오르다니요.
E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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